복음서를 매일 읽습니다.
동시에 바울의 서신서를 매일 읽습니다.
복음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알게 됩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뿌리를 이해하게 됩니다.
복음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믿음으로 살 수 없을 거 같습니다.
예수님의 천국비유마다 자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바울의 서신서마다 믿음이 자라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태어난 아기가 자라 어른이 되기까지 많은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을 겪기 위한 시간도 필요하고요.
저도 그 과정을 겪고 있는데,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지금 우리의 문제는 무지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배우지 않기에 무지합니다.
나름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하고, 성경공부를 한다고는 하지만
말씀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말씀을 알 수 없습니다.
말씀으로 살아간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난한(상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말씀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절박함이 없다면
말씀에 집중하지도 못하고, 말씀에 순종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무지하게 만드는 요인이 바로 ‘안일함’입니다.
먹고 살만하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안일해집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을 고백해도, 실제론 자기 소견대로 살아갑니다.
나름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하고, 성경공부를 한다고는 하지만
모든 결론은 자신이 내리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고서야 ‘여호와 이레’를 불렀습니다(창22장).
레위사람들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고서야
하나님이 진실하시다는 걸 알았습니다(느9장).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지식은
말씀을 좇아 순종하지 않고는 가질 수 없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으로 기도하고
말씀으로 고민하고, 말씀으로 찬양하고
말씀으로 답을 찾고, 말씀으로 인내하는
'과정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갔습니다.
무지는 사람을 천박하게 만듭니다.
언행이 가벼워지고, 깊이가 얕고, 생색을 내고, 자랑을 하고, 교만해집니다.
이런 천박함을 정죄할 수는 없지만, 惡하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돈과 성경책이 많아질수록
예배당과 예배당에 모이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더 천박해지고 있습니다.
이게 저의 독단적인 눈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세상이 그리스도인의 천박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이 구원을 받았는데
그 생명이 천박해진다는 건 정말 아이러니합니다.
천박함으로, 믿음이 깨어져서 지옥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아마 지금 마귀의 가장 주효한 전략이 바로 무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무지에서 벗어나는 길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을 배워야 하고, 성경을 살아내는 겁니다.
그 다음, 끊임없이 독서를 통해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변화무쌍한 세상을 말씀으로 산다는 건, 정교한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독서를 할 수 없는 문맹이거나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에게서 말씀을 듣는 걸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걸 매일 꾸준히 해야 하는데, 인내로 말씀의 열매를 맺습니다.
‘인내하기’, 아마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문제일 겁니다.
조금 아는 걸로 ‘하산’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평생 공부를 해도 하산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스스로 선생이 되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실 때, 그때 선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상함은 인내에 있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믿음의 사람들의 고상함도 인내에 있습니다.
배우고 또 배우고, 순종하고 또 순종하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이런 고상한 그리스도인들을 본 적 있습니까?
이런 고상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가는 여러 성도들을 본다는 건, 정말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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