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행위입니다. 형법에서 살인죄는 타인의 목숨을 해치는 경우에만 해당이 되니, 자살을 살인죄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자살은 살인죄는 아니지만, 살인죄보다 더 무거운 죄입니다. 살인죄를 저지르면 자신의 목숨은 남아서 회개할 가능성이 있지만, 자살을 하면 모든 게 끝입니다. 자살을 함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구원을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겁니다. 자살은 본인에게만 끝이 아니라 남은 가족들에게조차 끝을 맺게 할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좀 오래 되었는데, 신학대학원 동기모임에서 서머나 교회 김성수목사의 설교에 대해 토론하는 걸 들었습니다. 저는 그를 전혀 몰랐기에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가, 후에 그의 설교 몇 편을 들었습니다. 창세기를 신약을 넘나들면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분석하면서 설교하는데 나도 모르게 섬뜩해서 놀랐습니다. 창세기 본문을 해체시켜 놓고는 다시 자신의 생각으로 본문의 메시지를 조립하는 겁니다. 또 얼마 뒤에는 그가 가수였다는 걸 알았고 그가 불러서 알려진 ‘집으로 가자’를 들었는데, 그의 설교를 들을 때와 같은 섬뜩함이 일어났습니다. 가사 1,2절을 한 마디로 말하면 ‘자살을 위한 (믿음의)담론’인 겁니다. 그래서 다시 모인 동기모임에서나, 교회 청년들에게 그의 설교나 노래를 조심하라고 일렀습니다. 한 동안 그를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어느 모임에서 그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의 설교나 노래를 들으면서 느꼈던 섬뜩함이 생각났습니다.
자살을 위한 담론을 끝내야 합니다. 동성애를 위한 담론을 끝내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동성애에 대해서 어떤 연민도 허용되지 않는 것처럼, 자살에 대해서도 어떤 연민도 허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이제 우리의 몸(목숨)은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 살아난 몸(목숨)인데, 자살한다는 건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게 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다시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 온갖 믿음의 언어들로 치장하면서 예수님을 다시 죽이는 담론을 끝내야 합니다. 이런 담론은 ‘이미지’로만 가득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데, 그 안에는 어떤 ‘진리’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가득한 온갖 죽음의 이미지들을 처리하지 않고서는 믿는 자의 자살을 막을 수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과 관련되는 게 아니라 상상과 직관, 사회적 행위와 관련되어 있어서, 진리의 말씀에 서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혹하게 합니다. 진리의 말씀과 관련되지 않는 모든 담론은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갸롯유다가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27:4)는 말을 한 것에 연민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겁니다.
자살자가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아니면 모두 지옥에 가느냐 하는 ‘논의(담론)’ 자체가 무익합니다. 자살하는 도중에 회개를 했다면 천국에 갈 수 있느냐 등의 논의도 무익합니다. 의로운 일을 위해 자살을 하는 것에 대한 논의도 무익합니다. 자살을 정신병증으로 보는 것에 대한 논의도 무익합니다. 이런 논의를 할수록 바른 지식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혼란스러워집니다. 자살은 백 인을 살인한 것보다 더 큰 죄입니다. 하나님께는! 우리에게 중요한 논의는 자살의 원인이나 형태, 구원 여부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에밀 뒤르케임이 [자살]에서 자살을 사회적 사실로 간주하고 현대의 병리현상으로 자살을 논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익하다는 겁니다. 자살에 관한 논의의 핵심은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는 ‘죄성’이어야 합니다. 여기에 기반을 두고 자살의 원인이나 형태, 결과를 논의해야만 합니다.
댓글1개
우연히 설교글을 읽었는데, 굉장히 좋았고 느끼는바가 많다 생각된 글들이 있어서
혹시나 봤더니 김성수목사의 설교문들이었습니다.
인간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앞에 죄인임을 알아가는 것이다라는 글들이 매우 와닿았고
진지하고 샤프하다 생각되었는데,
제 머리가 띵..., 아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