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그냥’ 하는 겁니다. 기도하고 하고 싶지 않을 때도 ‘그냥’ 기도 하는 겁니다. ‘그냥’ 한다는 건, 그냥 밥을 먹는 거와 같은 겁니다. 왜 기도해야 하는가를 따질 수 없는 겁니다. 그냥 기도한다고 해고, 기도하는 말도 ‘그냥’ 하는 말일 수는 없습니다. 기도에는 의중이 들어가야 합니다. 기도하는 내 의중이 들어가야 하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의중이 들어가야 합니다. ‘깊은’ 기도란, 하나님의 의중을 파악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의중을 내 의중으로 삼는 걸 말합니다. 어느 때보다 역동적인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합니다. 정신을 차려서 기도해야 합니다. 방언 통역을 한다면 몰라도, 방언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성경구절)은 ‘병 속에 든 메시지’와 같은 것이니, 마음에 새겨진 말씀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성공’에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기도는 그 자체가 성공이라는 걸 믿어야 합니다. 두서없이 기도를 ...했다고 해서, 같은 말을 반복한다고 해서 중언부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성이 없는 말들이 중언부언입니다. 누군가 말하기를 '자기됨selfhood은 실체적 똑같음이 아니라 시간을 넘어서는 인격들의 지속성과 관련된다'고 말했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같은 말을 아무리 반복해도 중언부언이 아닙니다. 청년수련회에서 밤새도록 기도를 하게 합니다. 수련회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예배에서도 제법 긴 시간 소리를 내어 기도하게 합니다. 처음 참석하는 사람들은 고역일 수도 있지만 그만 둘 수 없는 시간입니다. 기도하는 ‘느낌’을 중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기도 자체가 당연하기에, 기도를 시작하기 위해 어떤 동기를 찾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굳이 기도하는 동기를 찾는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 때문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주시는 게 있지만, 우리를 복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건 기도를 해야만 이루어지는 약속들입니다. 기도를 해야만 이루어진다는 걸 두고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말로 풀이하면 곤란합니다. 지성至誠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겁니다. 누구든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촘스키가 말한 “(언어의)적절한 능력”(사람은 언어능력을 타고난다)처럼, 하나님을 향한 믿음만 있으면 기도할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그냥’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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