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50대. 50대는 거짓말을 진짜처럼 한다. 황우석 교수처럼 과학으로도 거짓말을 한다. 50대는 모든 걸 정치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50대가 되면 잔인해진다. 욕망에서든, 소유에서든, 50대는 자신의 영역을 펼치려고 한다. 이외의 영역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진다. 50대가 보수주의화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정치적일수록 진보주의자가 되는데 50대는 보수주의자가 된다. 가장 폭력적인 보수주의자가 된다. 50대 보수주의자에게 힘이 몰릴 때,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2.
50대가 되면서부터 얼굴이 두꺼워진다. 삶의 연륜에 따른 얼굴 두께가 아니다. 유치찬란한 유아기로의 회귀다. 성장하는 유아기 특징이 아니라, 성장을 멈춘 유아기의 특징을 그대로 가진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려고 한다. 자기중심적이다. 돈이 없어서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하려고 하고, 재주가 없어서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하려고 하고,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자기만의 개성을 드러내려고 하고,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고, 먹고 마시고 만지는 감각적인 경험을 하려고 한다. 물론 가난한 50대에겐 이런 모습을 보기 힘들지만, 부자 50대일수록 이런 모습이 두드러진다. 이전에 경험한 세계에 대한 흔적에 따라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떻든 간에 50대가 되면서 자기중심이 강화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50대와 친구가 되려면 50대의 비위를 맞춰줘야 한다. 50대의 친구들은 생활수준이나 사회적 계층이 유사하게 되는데, 이들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서 서로 채워주는 우정을 발휘한다. 패거리 우정이 두드러진다. 이런 50대의 우정은 60대를 거쳐 죽을 때까지도 지속될 수 있다. 어릴 적 친구에 대한 향수처럼, 50대에 친구가 되면 동시대의 삶을 공유한 애틋함이 생기기 때문이다.
3.
문제는 50대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다. 50대는 성찰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자기중심적이다. 주변 사람들은 50대 비위를 맞춰주는데 피곤할 수밖에 없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자기가 하면 로맨스로 치부하는 50대 앞에서 진실을 들이댄다는 건 관계를 깨자는 것과 다름없다. 50대와 마주하면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감동을 줘야 한다. 다른 감동이 아니라 50대를 인정함으로 감동케 하는 거다. 이런 50대가 교회일을 하게 되면서 교회는 어려워진다. 성경읽기나 기도, 인격의 변화가 정체된 50대가 교회일을 하는 패턴은 뻔하다. ‘폼생폼사’이거나, 자기 연륜이나 신념으로 밀어붙이는 거다.
4.
비겁한 40대는 천박한 50대가 된다. 비겁한 사람은 자신이 비겁하다는 걸 알지만, 천박한 사람은 자신이 천박하다는 걸 모른다. 50대가 되면서 자아를 볼 수 있는 정직함을 잃는다. 착한 마음으로 착한 일을 하는 50대나 나쁜 일을 하는 나쁜 50대나 공통점이 있다. 모든 게 ‘나’ 중심이다. 착한 50대는 착한 일을 하는 자신에 대해 뿌듯해 하고, 나쁜 50대는 나쁜 일을 하는 자신을 변명하면서 자신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50대 치고 객관성을 가진 사람을 본 적 있는가? 50대만큼 보수주의 포퓰리즘이 강한 세대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50대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이고, 현재를 유지하거나 발전시킬 수 있는 미래다. 결코 미래를 통하여 현재를 보지 않는다. 결국 50대는 인과론을 떠받든다. 부버가 ‘사람에게 있어서 숙명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숙명에 대한 신앙’이라고 말했는데, 50대가 가진 숙명은 인과론에 바탕을 둔 세속주의다.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의 50대를 보라. 목사든 장로든 간에, 대부분 50대는 세속주의다. 하나님 나라를 내걸지만, 실상 세속주의에 빠져 있다. 이런 인과론, 세속주의, 보수적 포퓰리즘에 젖은 믿음은 더 이상 믿음이 아니라 미신이 된다. 미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가지는 두려움이다. 푸닥거리를 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거와 50대가 바라는 것은 다르지 않다. 지금 교회 안에 미신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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