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CBS 몸(10)-몸과 교회생활
Q. 누군가를 위해 돈을 쓰는 것과 몸을 움직이는 것이 차이가 있나요?
A. 누군가를 위해 돈을 쓰든 몸짓(봉사)을 하든, 정말 잘하는 것이라고 격려하고 싶습니다. 보통 사람의 경우, 특별한 이해관계가 있거나, 혹은 자기의 신념에 적합할 때에만 누군가를 위해 돈을 쓰거나 몸짓을 하기 때문입니다. 질문자는 누군가를 위해서 ‘돈’을 쓰는 것과 ‘몸짓’을 하는 것의 차이를 묻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이 소유한 것들을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돈을 쓰는 사람이 몸짓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고, 몸짓을 하는 사람이 돈을 쓰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청년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당신이 지닌 소유물을 처리하고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몸짓만 아니라 돈까지도 처리하기를 원하셨던 겁니다. 아시는 것처럼, 부자청년은 돈을 처리하지 못해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걸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사실은 그 반대의 비유도 들 수 있습니다. 돈을 다 낼 수 있는데 몸짓은 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돈을 처리하지 못하는 사람, 몸짓을 처리하지 못하는 사람의 내면과 믿음,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싶지만,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분명한 건 우리들 대부분이 둘 다 모두를 처리하지고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몸짓은 하지 않고 돈만 내놓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은 숨겨두고 몸짓만 합니다. 어느 경우든 간에 부족한 믿음인 겁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들 모두는 둘 다 처리하지 않고서는 ‘온전한 믿음’으로 자라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온전하지 못한 믿음이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을 다하지 못하는 겁니다.
Q. 요즘은 편리&효율을 위해 몸의 움직임이 없이 돈을 쓰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내가 속한 가정 교회 학교 직장에서 이런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내가 먼저 본을 보이는 것이 필요한가요? 그러다보면 때로는 혼자만 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요?
A. 혼자가 된다는 것, 그리스도인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혼자가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던 것처럼, 누군가 혼자가 되어 십자가를 짊어지고 감으로 모두가 구원을 받곤 합니다. 성경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여기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은 ‘르네 지라르’의 책들을 참고하기를 바랍니다)
이 질문은 위의 1번 질문과 연결됩니다. 요즘 교회들은 돈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교회청소에서부터 교회행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돈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근데 만일에 돈으로 해결하지 않고 몸짓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면 많은 성도들이 큰 수고를 감수해야만 합니다. 예를 들면 주일 애찬 준비를 위해서 일군을 사는 경우가 그렇고, 교회청소를 위해서 청소부를 고용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렇게 돈으로 일군을 고용하면, 대다수 성도들의 교회생활은 편해집니다. 또 봉사를 하면서 부대끼고 분열하고 시기하고 미워하는 부작용도 없어집니다.
그러나 이런 부작용이 사라지는 동시에, 성도들이 서로에게 발을 씻어줄 기회도 또한 사라집니다. 그래서 요즘은 발을 씻어주는 게 ‘세족식’으로 요약되고 있습니다. 진짜 발을 씻어줄 수 있는 봉사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성경의 원리를 생각할 때, 교회는 가능한 돈을 주는 일군을 고용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 외에는 일군을 고용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성도들이 수고를 감당하는 게 좋습니다. 그러나 예외도 있습니다. 이번에 예배당 입구 계단 공사를 했는데, 이건 성도들이 할 수 없는 공사입니다. 이런 경우는 일군을 고용할 수 있습니다. 근데 이런 전문성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 허드레 일인데도 일군을 고용한다는 건 교회답지 않은 모습이라고 봅니다.
질문자는 뭔가를 하고픈 의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각한 대로 행동하십시오. 만일 그렇게 해서 혼자가 되더라도, 실제론 그리스도와 더 가까이 하고 있다는 걸 기억하세요. 교회 밖에서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조차 우리는 혼자가 될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교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겁니다.
Q. 몸이 말씀대로 몸짓을 하는 것도 영적전쟁이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의 씨름이나 할례와 같이 특별한 때에 특별한 사건으로 몸짓이 크게 바뀌는 계기도 있다고 봐도 될까요? 아니면 교회생활 중에 천천히 몸짓이 바뀌어 간다고 봐야 할까요?
A. 어제 리더모임에서 ‘몸짓이 때론 영적전쟁이 된다’고 했습니다. 가장 분명한 예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영적전쟁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를 아실 겁니다. 밤새도록 기도를 하시는데, 땀이 피 흘리듯이 흘렀다고 기록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몸짓을 할 때, 우리는 많은 고민을 하게 되고, 긴장을 하게 되고, 때론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작정했던 몸짓을 포기하고 맙니다. 게으름 때문이든, 사람들의 이목 때문이든지, 갑작스런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든, 믿음으로 작정했던 몸짓을 그만두는 건 영적전쟁에서 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몸을 마음(영혼)과 분리하지 마세요. 믿음을 몸에서 분리하지 마세요. 믿음이 있는 사람은 몸짓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혈우병 여인의 믿음을 보셨고, 지붕을 뚫고 내려온 병자의 믿음을 보셨다고 합니다. 또 나그네에게 물 한 그릇을 대접하는 걸 보신다고 합니다. 우리 몸이 살아 있을 생전에는, 우리의 몸짓을 보십니다. 심판 날에는 우리의 몸짓을 심판하시고요.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요한계시록22:12)
몸짓의 변화가 급변하느냐, 혹은 완만하느냐라고 질문했습니다. 둘 다 맞습니다. 야곱처럼 급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는 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삶에 변화가 필요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기도 합니다.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시는 선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변화를 각오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기회를 버린 채, 오랫동안 큰 변화가 없이 그냥 이력이 난 채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특별한 기회를 맞이할 준비를 하세요. 그러면 그 때가 오게 되고, 알게 되고, 붙잡게 되고, 결국엔 변화가 일어날 겁니다. 그리고 이후 어느 시간 동안에 아무 일이 없는 듯 진행되기도 합니다. 이럴 때 조급해하지 말고 부르심을 받은 그 자리에서 진지하고 정직한 태도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의 자신이 어제의 자신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해서 실망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있다면, 하나님의 우리를 위해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계시니까요!
Q. 오늘 TCBS 이후(혹은 이 예배 후의) 각 성도의 몸짓이 파격적으로 바뀔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생각해보면 그렇게 될까 싶습니다. 제 믿음의 회의적인가요?
A. 제 생각엔 그렇지 않습니다. 이 공부를 하고 난 후,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물론 그런 변화를 기대는 합니다. 저는 설교를 할 때마다 큰 기대를 하고서 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그렇게 기대치에 가깝지 않습니다. 서울이기는교회가 세워지고 이제 5년이 다 되어 가고 있습니다. 5년 동안 얼마나 많은 설교를 했는지 계산해보세요. 반복되는 말씀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럼 지금의 우리 모습이 얼마나 변화되었는가를 생각해보세요. 저는 매주일 기대와 실망을 하곤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실망’을 하는 것에 대해 ‘실망’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근데 저는 정말 실망합니다. 저의 지식과 안목은 정말 얕아서, 설교를 하고 나면 큰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곤 합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를 해준 뒤에도 그렇습니다. 근데 결과가 그렇지 못할 때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고, 내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관련되는 일인데도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실망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또 다른 소망으로 회복되곤 합니다. 하나님의 깊은 생각, 넓은 경륜, 높은 가치를 다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성을 하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바울이 왜 빌립보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해서 다른 것들은 똥으로 여긴다’라고 했는지 이해가 됩니다.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