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26:20-22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 같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시비를 일으키느니라.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1.
말은 마음을 표현합니다.
말하는 사람의 마음과, 말을 듣는 사람을 향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랑그이든 파롤이든(혹은 외재적 언어이든 내재적 언어이든), 말은 ‘관계’를 만들어 갑니다.
말에 따라 관계가 형성되거나 파괴됩니다.
말쟁이란, 말의 전문가가 아니라 말을 남용하는 사람입니다.
말하기에서 ‘理想’을 빼버린 채, 말하는 겁니다.
理想을 잃은 말에, 아무리 사실과 논리가 가득해도 결국엔 ‘관계’를 상실하게 됩니다.
Kripe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군가가 하나의 규칙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규칙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하나의 규칙을 준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 말은 함께 하는 공동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툼을 좋아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들입니다.
말이 마음을 드러낸다면, 늘 누군가와 다투고 있는 우리들이야말로 ‘문제아’들입니다.
그렇다고 나와 너, 우리 모두가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말의 理想을 찾아야 합니다.
理想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느냐에 따라, 말하기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한복음1;1)
태초 이전과 이후, 종말 이전과 이후에 참된 말은 ‘말씀’ 뿐입니다.
그러니 말씀이 말하기의 理想이 되어야 하는 건 지당합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벗어날 때, 그 사람의 말하기는 누군가와의 관계를 파괴시켜 나갑니다.
듣기에 악한 말 뿐만이 아니라, 듣기에 고상한 말까지도 그렇습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가르치는 건 ‘말하기’입니다.
죽이는 듯하나 살리는 말이 있고, 살리는 듯하나 죽이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을 베는 듯하나 치유하는 말이 있고, 감싸주는 듯하나 치명상을 입히는 말이 있습니다.
말하기를 배워야 하고, 듣기를 배워야 합니다.
듣기를 배워야 하고, 말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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