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북의 페친이 불교의 성철이 석가탄신일에 발표한 시와 죽기 전에 쓴 열반송을 올린 걸 읽고서 쓴 글입니다. 30여 년 전 성철의 태도와 지금 현대인들-특히 지식인들-의 태도는 하나님께 대해 대담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바를 짧은 글로 함축하여 적습니다.
惡은 현실적인 힘입니다.
우리의 현실이 惡이고, 우리를 누르는 힘이 惡이라는 겁니다.
마치 임금처럼 세상의 모든 것들을 부립니다(요12:31).
의지를 가진 모든 것들을 부립니다.
사람이 惡해지면, 사람의 의지는 악에 대해 노예가 됩니다.
아무리 惡을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눈으로 직접 봤다고 해도
스스로 지옥을 선택하게 됩니다.
죄로 인한 가책감이나
허물로 인한 허물의식이나
기억으로 인한 반성이 소용없게 됩니다.
惡은 하나님을 대적했던 마귀의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윤리와 상식을 갖추고 고상하거나
철학과 종교를 갖추고 경건하더라도
惡을 떠날 수 없습니다.
惡은 의외로 고상하거나 경건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깨달음’이나 ‘더 나은 자아’
혹은 ‘이상’은 惡에 기만당해서 하게 되는 헛된 생각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좋게 봐도 나르시시즘적 힘일 뿐입니다.
허위일 뿐인 고상과 경건을 이상으로 본다는 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유사합니다.
惡한 사람은 善을 몰라서 惡한 게 아니라
마귀의 악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귀신을 쫓을 때마다 귀신들이 내뱉는 말은
‘내가 하나님이다. 이 놈(귀신들린 사람)은 내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마귀는 늘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고
악은 늘 자신을 선과 동일시합니다.
가장 큰 惡은, 자신을 惡하다고 하지 않고 善하다고 여기면서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겁니다.
惡은 거짓과 기만이라는 두 기둥으로 건축됩니다.
성철은 ‘스스로’ 거짓과 기만을 선택했습니다.
惡한 줄 알면서도 惡을 택할 수밖에 없는 노예의지였던 겁니다.
성철은 ‘생각없음’을 생각했고
그 결과 우리를 둘러 싼 우주 안에 있는 의미는
우리가 도달할 수 없다고 하면서 우주 그 자체를 신성시했습니다.
만일 진리가 있다고 해도 ‘떠도는 의미’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떠.도.는.의.미.
욕설과 진리 간에는 차이가 없고
사람과 신도 차이가 없고
善과 惡도 차이가 없고
성자와 살인자도 차이가 없고
천국과 지옥도 차이가 없게 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 자체 惡한 사람입니다.
惡에 대한 의지가 노예의지에서
이제는 그 자신이 신화神話를 만들어 가는 겁니다.
신화의 신들은 서로 정죄하고 대적하고 쟁취해 나가지만
자신의 신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고상(윤리와 상식)과 과 경건(철학과 종교)으로
세상 모든 이치를 변증법적으로 용해시켜서
성경의 창조와 심판, 구원까지도 ‘떠도는 의미’로 만들어 버립니다.
불쌍한 사람들, 惡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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