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요한복음 7:24)
예수님은 많이 배우지 못하셨습니다. 유명한 랍비들에게 미쉬나를 배우지 않으셨기에 지식인으로 대접받지 못하셨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촌놈’이라는 낙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시고 하신 말씀이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 판단하라는 겁니다.
공의. 義를 말합니다. 義를 잃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만 했습니다. 소와 양, 염소의 배가 갈라지고 피가 흘러내리고 고기는 불에 태워져 연기로 하늘로 흩날림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죽음이 없는 義는 애초에 없는 겁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구약의 짐승들처럼 희생제물로 죽으신 겁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셨고, 자신의 죽음이 우리에게 미칠 영향을 아시고서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을 공의로 판단하라고요.
나사렛 예수의 죽음으로 사람을 판단하라는 겁니다. 나사렛 예수를 죽게 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서 사람을 판단하라는 겁니다. 왜 나사렛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죽었는지를 알고서 판단하라는 겁니다. 나사렛 예수의 죽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이제 어떻게 의롭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고서 판단하라는 겁니다. 나사렛 예수의 義를 배워야 하는 겁니다. 이미 이사야는 “너희는 선행을 배워라. 정의를 구하라”라고 선언하고서는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1:17)고 권하고 있습니다. 공의로운 판단을 한다면 가지지 못한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잘 난 검사들만이 아니라 교회의 목사들을 비롯한 교회 어른들 대부분이 그를 무시했습니다. 고졸, 그것도 상고 출신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무시했습니다. 여상 출신인 그의 아내까지도 싸잡아 무시했습니다. 그의 말투, 그의 걸음걸이 등, 그에 관한 모든 것들을 ‘촌놈’으로 무시했습니다. 그의 정치적 소신이나 정책, 그의 인격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언론에서 그를 빨갱이라고 하니까 교회도 덩달아 빨갱이라고 욕했습니다. 이게 한국교회의 수준입니다.
제가 신학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목사들의 학벌 콤플렉스입니다. 학창시절에 공부 못했던 부모가 치맛바람을 날리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학력 콤플렉스는 교회성장 콤플렉스와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학위를 받아서 스펙을 쌓거나, 사역하는 교회에서 부흥해서 스펙을 쌓는 겁니다. 그래서 젊은 목사, 늙은 목사 할 것 없이 다양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편견이지만, 그런 타이틀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거나 좋은 자리로 가는 데는 도움이 되는 것은 봤지만, 교회의 목회에 도움이 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들의 콤플렉스로 인해서 교회는 하나님의 공의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불의한 죄인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의인을 위해서 죽을 수는 있지만 죄인을 위해서 죽는다는 건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당시 잣대로나, 지금 잣대로나 바보 예수입니다. 가진 자를 대우하고, 가지지 못한 자를 학대하는 게 보편적인 겁니다. 공의로 사람을 대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태도를 버리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특별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겁니다. 누군가 말했듯이, ‘사랑이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주기를 원치 않는 사람에게 말입니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든, 우리는 자기(자아)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누군가를 제대로 사람으로 대우하지 못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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