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2)
Q. 아무리 좋은 것도 중독이 되면 결국 몸과 마음이 그것에 의존하므로 하나님을 떠나게 되기에 성경이 금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생활을 하면서 예배에 너무 많이 오고, 교회 모임에 너무 많이 오는 것도 ‘중독’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제 생각이 잘못된 걸까요?
A. 질문자가 말하는 중독은 독물이 체내에서 작용하는 intoxication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의존하는 addiction을 의미할 겁니다. 중독이라고 진단하려면 몇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먼저 무언가를 계속하려고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반복되고 심화되어서 내성이 생겨야 하고, 만일 하지 않으면 금단증세가 일어나야 하고, 중독이나 혹은 금단 증세로 인해 생활에 장애가 있어야 합니다.
질문에서, ‘아무리 좋은 것도 중독이 되면’이라고 했는데, 과연 좋은 일에 중독이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요? 만일 좋은 일에도 중독이 될 수 있다면, 좋은 일도 적당히 해야지 넘치게 해서는 안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 ‘예수를 믿어도 적당히 믿어야지 미치도록 믿으면 안되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과연 이 말이 맞는 말일까요?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 평생에 단 한 번이라도, 예수님께 중독이 된 적이 있는가요? 그렇게 중독이 되었다면, 그게 나쁘던가요? 제가 자신있게 말씀드린다면, 예수님께 중독이 된다는 건 오히려 다행한 일이지 절대 나쁜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밝혀야 할 게 있습니다. 아무리 중독이 되어도 나쁘지 않은 그 일이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예배입니까? 기도입니까? 봉사입니까? 아마 예수님을 죽였던 유대인들치고 예배와 기도, 봉사에 중독된 사람들이 있을까 싶습니다. 근데 왜 그들은 예수님을 죽였을까요? 질문자가 우려하는 것처럼, 예배 그 자체가 결코 좋은 일이 아니고, 기도 그 자체가 결코 좋은 일이 아니고, 봉사 그 자체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좋은 일이란, 예수님을 믿는 일 외에는 없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예수님을 잃은 채, 기도를 하고 봉사를 하면서 예수님을 잃은 채 예배와 기도, 봉사에 탐닉하게 될 때, 그걸 중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예수님께 중독이 된다면, 분명히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될 겁니다. 이 교회가 지향하는 바가 바로 그런 사람을 만드는 겁니다. 교회의 목표는 모든 사람을 예수님께 중독이 된 사람으로 만드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갈망하고, 예수님으로 인해 내성을 가지게 되어서 웬만한 고통도 다 견뎌내고, 예수님과 멀어지면 금단증세가 일어나고, 그로 인해 아무것도 못하게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Q. 주변에 문신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직장 동료가 아내의 이름으로 몸에 문신을 새겼고 앞으로 태어날 아기의 이름도 몸에 새길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막상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어떻게 이야기 해줘야 할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배우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야기 해야 좋을까요?
A. 의외로 문신을 하는 사람들은 진지합니다. (치기로 문신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예외로 두겠습니다) 문신을 해주는 타투이스트들도 진지합니다. 몸에 사랑하는 사람의이름을 새기거나 글을 새기는 걸 레터링한다고 하는데, 보통 혐오스런 그림을 새기는 걸 마다하는 사람도 이런 레터링에 대해서는 관대합니다. 그리스도인 경우, 몸에 성경구절을 새기거나 예수님 얼굴을 새기는 경우도 많습니다.
결론을 말한다면, 어떤 문신이든 성경은 문신에는 부정적입니다. 프로이트와 같은 사람들이 문신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분석해 놓은 것이 아니라도(성적 도착이나 성적 억압 때문에 문신을 한다고), 문신을 할 때의 마음은 평범한 마음은 아닌 게 분명합니다. (참고사이트: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85692&cid=472&categoryId=472, 혹은 네이버의 지식백과에서 ‘문신의 역사’)
그렇다고 문신을 하는 사람들에게 문신의 종교적,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장황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문신을 하는 사람들의 진지함은 그렇게 거창한 동기에서 나온 게 아니라 ‘그냥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신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말해주면 어떻겠는가 싶습니다.
. 문신을 하면 아플 건데
. 몸에다 새기는 것보다 마음에 새기는 게 더 좋을 건데
. 문신을 했다가 혹 마음이 변해서 문신을 지우려고 하면 힘들건데
. (믿는 사람에겐) 성경은 문신을 부정하고 있는데
. (믿는 사람에겐) 문신을 하는 것보다 문신을 새길 그 몸으로 열심히 사는 게 좋은데
.
Q. 문신, 술, 담배와 같이 하나님이 그 자체를 금하는데 저희가 타협하려거나, 저희가 잘 모를 수 있는 것이 또 있는지 궁금합니다.
A. 문신, 술, 담배는 예에 불과합니다. 문신과 술은 성경에서 금지하고 있지만 담배는 성경에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근데도 담배를 금하는 것처럼,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①몸에 나쁜 영향을 주는 것들입니다. ②중독이 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③성경의 문맥상, 금지해야 할 것들입니다.
문제는, 우리는 늘 이런 문제에 직면할 때 곤란해 하면서 쉽게 타협하려고 하는 겁니다. 타협하는 동기는 늘 같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혹은 누군가에게 마음을 더 확실히 전해주기 위해서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 더 마음을 두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잃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음식 하나로 목숨을 걸었던 믿음의 이야기를 알면서도, 우리는 너무도 쉽게 궤변으로 타협하고 맙니다.
진리 위에 서 있지 않으면 무너지게 됩니다. 최근 기독교를 비평하면서 유행하게 된 단어가 있습니다. ‘근본주의’라는 말인데요, 말하는 사람에 따라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달라져서 뭐라고 규정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우리의 믿음은 성경에 근본을 둬야 한다는 겁니다. 성경이 가는 데까지 가고, 성경이 서는 곳에서는 서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지 않고 이런저런 말로 선을 넘어서게 되면, 우리는 모든 걸 잃게 될 겁니다. 생명까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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