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메스와 예수
해석학hermeneutics의 어원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 헤르메스Hermes이다. 헤르메스는 신들의 말을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신들의 使者이다. 사람들은 헤르메스가 하는 말을 통해 신들의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헤르메스는 태어나자마자 소를 훔치고 거짓말을 해대더니 장성한 뒤에 신들의 사자가 된 뒤에도 훔치고 거짓말을 해댔다. 사람들은 헤르메스가 하는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헤르메스의 말을 해석해야만 했다. 신들의 말을 그대로 전한 것인지, 아니면 헤르메스가 자의로 해석을 해서 사람들에게 전한 것인지 수가 없었다. 해석학의 과제는 우리에게 전해진 것과 원래의 텍스트의 차이를 파악하는 것이다. 텍스트와 해석자의 해석에는 차이가 있다. 이 차이를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태도는 바로 우리들의 믿음과 삶의 태도와 연결된다.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하버마스는 대화(담론)를 통해서 차이를 줄여 합리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가다머는 과거를 들먹이면서 전통적인 가치 위에서 원래의 의미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차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들이다. 반면, 니체 같은 사람은 이러한 차이를 즐거워한다. 차이가 있어야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고 반사적으로 묵은 의미들은 소멸한다는 것이다. 21세기 해석학은 다양한 방법론이 있겠지만, 니체를 안고 있지 않나 싶다. 상용화를 앞두고 있는 Ubiquitous Computing 같은 것을 보면, 과거에는 다양한 부품들이 한데 모여 한 대의 컴퓨터를 형성하던 것이 이제는 각 부품들이 그 특성에 따라 특별한 기계들의 부품으로 활용되면서 효율성을 최대화하는 것이나, 문학계가 형식과 내용이 미완성인 채로 독자들에게 내용과 의미를 남겨두는 작품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면, 니체의 혜안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은 어떤 태도르 가져야 하는가. 텍스트와 전달자와의 차이를 없애는데 주력해야 하는가, 아니면 차이를 그대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즐겨야 하는가. 텍스트가 문학이나 철학과 같은 경우라면 니체든 하버마스든 누구든 그들의 입장을 극구 반대할 이유가 없지만, 텍스트가 성경인 경우에는 어떤 해석학적 입장을 취하는가에 따라 결과는 심하게 달라진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이 헤르메스와 같이 텍스트에 장난을 쳤다면, 성경저자들의 텍스트였던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하지 않고 장난을 쳤다면, 과연 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말이다. 좀 더 현실적인 문제는, 이 성경을 텍스트로 삼아 설교를 하는 목회자들의 설교를 그대로 받아들 일 수 있는가 말이다. 물론 목회자들이나 성경의 저자들은 자신의 글이나 말에 진실성을 보증하지만, 그것이 사실인가 말이다. 강의석군 퇴학 문제로 이슈의 중심이 되었던 대광고등학교 교목이 자신의 사이트에 자신의 솔직한 신앙관을 적었는데, 그 교목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지 않는다고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일뿐이고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지도 않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15년간 교목을 하신 분이 우리들의 텍스트인 성경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 그냥 인식의 차이라고 봐야 할까. 결국은 해석의 차이이다. 해석의 차이가 신앙의 차이를 가져왔다. 혹자는 해석을 이처럼 비중있게 다루는 것에 대해서 불쾌할 수 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라. 사람들은 아무 생각없이 "믿습니다"라고 하지 않는다. 밖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면에 역동적으로 흐르고 있는 해석적 통로를 거쳐서 믿는다고 고백한다. 해석적 통로는 논리적 통로와는 다른 전인격적인 수용과정이다. 나다나엘이 주님을 만난 뒤에 주님의 제자가 된 것이나, 삭개오가 주님을 만난 뒤에 재물보다는 주님을 주인으로 섬겼던 것이 그러하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해석자이다. 자신이 신이면서 신들의 말을 전했던 헤르메스와는 다른 차원이지만, 텍스트를 주체적으로 해석해야만 하는 해석자다. 텍스트를 가장 처음으로 받아서 해석을 하여 전해준 장본인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서 그대로 재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시고 전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이 가장 많이 사용하신 비유가 그러한 경우이다. 예수님의 비유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해석하신 내용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해석하신 내용을 다시 해석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 성경을 해석하지 않으면 복음을 깨달을 수 없고, 믿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해석되지 않은 성경지식은 성경을 100번을 읽고 외웠다고 해도 자신의 믿음과 삶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우리들이 하는 해석적 행위와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해석적 행위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차이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들의 해석은 텍스트와 일치를 하게 되고, 저들의 해석은 거리를 가지게 된다. 저들은 그러한 거리를 즐기는 경향이 있는데, 학문적 쾌감일 수도 있고 아니면 진지한 인간애에서 비롯한 수용일 수 있다. 반면 우리들은 거기를 좁혀 나가려고 무지 애를 쓴다. 만일 거리감을 도저히 좁힐 수 없다면 "믿습니다" 라는 말로 거리를 단번에 없애버린다. 이렇게 "믿습니다" 라는 고백은 분명히 해석적행위이다.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자기자신에 대한 진솔한 성찰이 없이 "믿습니다" 라고 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해석자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보여 주셨던 해석적행위 중에 겟세마네동산에서 보여주셨던 해석적행위를 잊지 않으면 안된다. 예수님은 단순히 그냥 십자가를 지신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치열하게 해석하신 후에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거기서 보여준 예수님의 해석적행위는 보통 사람들이 하는 해석적행위와는 다른 점이 많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의미만 해석하신게 아니라 십자가로 인한 고통도 해석하셨던 것이다. 의미가 해석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수 있다. 사고의 고통만 겪으면 되니까. 그러나 마음과 육체에게 미칠 것들까지도 해석하고 그 의미를 마음과 육체에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예수님은 온 몸과 온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으셨고 우리들에게 전하셨다. 골고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육체처럼 분명한 해석이 어디에 있겠는가. 예수님은 철학자들이나 정치가들처럼 말장난하며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전시간-과거와 현재와 미래-을 위해 모든 비판과 고발의 피의자가 되셔서 기꺼이 벌을 받으셨다. 철학자들이나 정치가들은 미래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현재와 과거를 마구 난도질하는 재판자가 되려고 한다. 인류가 자랑하는 철학자들이나 정치가들의 진지한 삶과 의미있는 말을 존중하나, 실상 그들이 가졌던 진지함이나 의미들은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와 같은 것이었다. 백 보 양보하여 그들이 늘 하는 말대로 ‘진리는 해석의 문제’라는 말을 받아들이더라도 그들이 의미하는 해석적행위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이미 그들은 텍스트를 해석하기 전에 진리에 대한 소유욕으로 가득 차 있다. 주관주의이든 객관주의이든 회의주의자이든 아니면 니체같은 입장이든 간에. 우리는 이 성경을 소유할 수 없다. 성경으로 살아갈 수는 있어도 성경을 소유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뿐이다. 하버마스가 그리도 강조하는 대화도 해석적행위도 그리 능률있는 방법은 아니다. 서로 대화를 해봤자 거기서 거기인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다고 다양한 종류의 해석이 있는게 아니다. 예수님의 해석적행위는 다양한 종류가 아니라 다양한 면을 보게 하는 입체성을 제시하셨다. 방향은 다양했어도 지향점은 단일하셨다. 이런 태도는 그냥 주어진 게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부정과 고뇌와 십자가를 짊어지는 결단의 결과이다. 고뇌하셨고 통곡하며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해석적행위는 이론이나 종교적인 교리에 대한 맹목적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삶"을 살아가는 삶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실천이었다. 거기에는 어떤 정치적 신념이나 종교적인 헌신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예수님을 사로잡은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었지,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같은 제사장 무리들처럼 하나님의 뜻을 가장한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계산이 없었다.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해석은 언제나 거룩이나 정의와 같은 이상적인 명분이나 생산이나 분배와 같은 현실적인 명분을 가지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위한 이기주의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셨고, 이것을 지적하셨고, 이것을 가지지 않도록 경고하셨다. 예수님이 가진 자들-부자와 권력자들-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 중에는 가진 자들이-하나님으로부터 뭔가를 맡은 청지기들-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종을 억압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내용이 많다. 그리스 신화의 구조를 빌면 이들은 모두가 헤르메스와 같은 사람들이다. 이미 주인의 뜻을 거스린 종들이 어떤 명분을 걸고 일해도 주인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거룩이나 정의 혹은 효율적인 생산과 공평한 분배가 행해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이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좀 더 상세한 해석을 요구하며 여러 가지 질문을 했지만, 예수님은 침묵하시거나 자신의 삶과 말과 행하시는 일을 보고 알아서 해석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삶 전체가 해석적행위이다. 해석적행위라는 말이 신학적으로 혹은 사회학적으로 합당한지에 대해서는 자신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개개인이나 교회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위해서는 혹은 하나님 나라를 적극적으로 펼쳐나가기 위해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은, 교리나 전통보다는 예수님의 해석적행위의 삶을 통해서 동기와 목적을 정립하는 것이다. 유비쿼터스의 실현이 시급한 것은, 예수님의 해석적행위를 가진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예수님은 지금까지도 우리들의 해석자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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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우리는 또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