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읽기는 성경에 기록된 언어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성경의 원어(헬라어■히브리어)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성경읽기를 하기 위해, 성경읽기를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가끔 원어를 강조하는 식자들이 단어의 어원에 치중하여 본문내의 특정한 상황에서의 독특한 의미(혹은 기능)를 무시하고 통합해버리는 해석을 접한다. 이런 해석은 본문을 읽어 놓고는 본문을 떠나서 해석을 하는 우를 범한다. 성경읽기는 분문 전체의 흐름 안에서 단어나 문법의 미묘한 차이를 분석해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역성경이나 영어성경은 신빙성이 있는 번역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성경읽기를 통해서 본문의 의미들을 깨달을 수 있다. 특히 이야기체인 역사서의 경우는, 본문에 나타난 배경■인물■사건을 주의하면서, 성경전체를 하나의 이야기로-One Story-로 보고 본문이 차지하는 위치를 함께 파악해야 한다. 이런 진지한 자세를 견지하지 않으면 주관적이고 임기응변적인 해석이 되기 싶고, 본문의 의미와는 동떨어질 수 있다.
2.
먼저 우리는 성경의 의미는 본문에 내재되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의미를 담고 있는 장소로서의 언어(language as the locus of meaning)를 생각해보라(「TCBS성경」에서 2회 언급하였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는 방법이 다양하지만, 성경의 언어를 통해서 계시하는 방법을 가장 중요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으로 사용하셨다. 환상이나 꿈, 기적 같은 것들은 하나님이 드러내고자 하시는「의미」를 온전히 담지 못한다. 시,공간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인 면에서도 한계가 있다. 그러나 언어는 다르다.
하나님은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미」를 드러내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이
다. 언어로 기록된 본문에는 주체와 객체의 의미가 있다. 본문에 기록된 모든 단어의 의미를 알면서도 그 본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모르는 경우, 대상에 대한 인식이 결핍된 것이다. 대상이란 한 단어 또는 말 전체가 지향하고는 내용을 말한다. 여기에는 사건이나 과정이나 물체가 포함될 수 있다.
사도행전 8장에 이디오피아 내시가 이사야53장을 읽으면서 이같은 질문을 한 경우이다.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행8:34). 그러나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경우, 대상의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경우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2천년이 지나는 동안 대상의 의미들이 많이 해석되어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금 성경읽기를 하는 우리들이 대상의 의미를 모르는 경우이다. 이것은 본문과 지금 우리와의 연결 문제이기도 한다.
성경읽기를 하고서도 지금 도움이 필요한 의미를 도출하지 못한다면 성경읽기는 허무하다. 이것은 대상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하는 의향의 문제이다. 하나님이 드러내시는 의미는 본문에 사용된 단어와 문장에 드러난다. 단어의 정의나 단어 혹은 전체 문장(문단)이 전후 문맥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 가이다. 해석이 다양한 본문들의 경우, 하나님의 의미가 본문에서 선명히 드러나지 않고 숨겨진 경우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본문을 대할 때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인내하여 경청하지 않으면-묵상하지 않으면- 본문이 의도하는 의미를 알기 힘들다.
또 문제되는 것은 본문이 의도하는 의미의 문제이다. 보통 진지한 성경읽기는 본문의 각 단어나 구 문장을 조합하거나 배열함으로서 표현된 하나님의 의도에만 관심을 가진다. 이런 경우, 하나님의 의도한 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읽기를 하는 사람의 ‘진지한 해석’에 그치고 말아, 하나님의 의도가 왜곡될 수 있다. 성경에는 문학적 기법이 사용되어있는데, 하나님이 사용하신 기법을 정확하게 볼 수 없는 경우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단어가 갖는 대상을 결정하는데, 성경읽기를 하는 우리들이 하나님이 의도한 것을 초월하는 경우가 많다.
성경읽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도인데, 하나님의 의도가 언제나 본문이 드러내는 의도와 언제나 일치하는 가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가,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를 돕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사람들의 의도와는 다른 경우가 있다. 구약의 고레스왕의 경우를 보라. 그는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고레스를 종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사용하셨다(사45:1-4). 「목적과 진리」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성경(진리)이 기록되어졌지만, 우리들이 성경읽기를 통해서 도출한 하나님의 의도를 하나님의 목적으로 여겼는데, 알고 보니 하나님의 목적과 관계없는 경우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의도와 성경저자의 의도가 다르다는 말인가? 우리가 배운 바 「영감」은 성경저자들이 하나님에게 감동되어 본문이 기록되는 모든 순간에도 성령이 함께 하셨다. 따라서 성경본문을 하나님의 의도와 성경저자의 의도(혹은 본문 자체의 의도)를 분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경저자들은 자신이 받은 계시의 내용을 상세히 다 알 필요가 없었고(또한 상세히 알지 못했다), 받은 계시를 어느 정도 이해하였던 정도였다.
그리고 본문과 역사성의 관계를 생각해야 한다. 본문의 의미는 고정적이지만 본문의 의의는 고정되지 않으며 발전(혹은 성장)하기 때문이다. 21세기 한국사회 속의 우리들은 2천년 전의 의미를 받아들이지만, 의의significance는 2천년 전의 사람들과 동일하게 여길 수는 없다. 본문의 현대적 의의가 무엇인가? 본문의 현대적 의의를 무시한 채 2천년 전의 의미만을 해석하는 것은 허무하다.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깨닫고 공감할 때 은혜를 받는다.
이같이 본문의 의의를 파악하는 것은 성경읽기의 결과적 의미라고도 할 수 있다. 문제는 의의에 대한 해석은 해석자의 입장에 따라 다양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본문 내에 의의가 있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는 신학적 추론과 같은 본문 밖의 도구를 사용해야 하는 경우이다. 이것이 신학적 다양성의 주원인이다. 안타깝게도 의의를 도출하려는 다양한 작업들이, 의의의 깊이와 선명도를 더해주기보다는 본문의 권위까지도 무너뜨리는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본문을 대하는 사람들마다 자신의 가치관, 의향, 특징 속에 성경의 가치와 의도와 특징을 함몰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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