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언어
Q. 예수님도 행동의 진폭이 컸던 걸로 생각됩니다. 성격이 모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는 것에 괴리감을 어떻게 줄일까요?
A. 예수님이 사람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다르셨고, 주신 말씀과 하신 일이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두고 ‘행동의 진폭이 크다’라고 할 수는 있지만, 혹시나 이 말의 의미를 오해할 것 같아서 몇 마디 붙입니다.
질문자는 예수님에게서 나타나는 행동의 진폭을 성격문제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행동의 진폭은 성격문제가 아니라 동기나 목적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누군가에게는 엄하게 대하셨기에 엄한 성격이라고 할 수 없고, 또 누군가에게는 부드럽게 대하셨기에 온유한 성격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에는 엄하게 하셔야만 했기에 엄하게 하셨고, 누군가에는 부드럽게 하셔야만 하셨기에 부드럽게 하셨던 겁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겁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다양하긴 하지만, 결과 면에서 본다면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당신을 어떻게 대하신다고 여깁니까?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혹은 한 사람에게조차 때에 따라 다르게 대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공평하지 못하셔서 그렇습니까? 변덕이 심하셔서 그렇습니까? 성실과 정의로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스가랴 8:8)이시라는 구절이 단지 하나님을 치장하는 말씀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교회 안의 사람들조차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아마 그들이 원하지 않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정직한 사람이라면, 우리가 겪는 고난까지도 하나님의 성실과 정의의 실현이라는 걸 인정하게 될 겁니다.
질문자는 자신의 성격 문제로 고민하는 것 같습니다. 때론 모나고, 때론 원만해서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을 가졌다는 겁니다. 사실 이런 성격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이런 성격문제의 뿌리는 기질이 아니라 인격에 있습니다. 타고난 성격이 있다고 해도, 인격이 성숙한 사람은 자신의 성격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성격을 다스리지 못한 사람이 부모가 되고, 리더가 되고, 선생이 될 때에 일어나는 부작용은 심각합니다. 단지 누군가의 나쁜 성격만으로 상처를 입었다면, 그 상처는 쉽게 치유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나쁜 인격 때문에 상처를 입었다면, 그 상처를 쉽게 치유되기 힘듭니다. 가해자의 인격이 변화되기 전까지는 치유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격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인격이 어떠한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니”(빌립보서 2:5)라고 권면했습니다. 믿음은 성격문제가 아니라 인격문제인 겁니다. 인격문제의 핵심은 마음의 문제이고요. 마음 문제를 다루는 책들이 많긴 하지만, 대부분 책들은 수박겉핥기 식의 내용입니다. 소위 베스트셀러라고 하는 책들이 그렇습니다. 마음문제를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책은 성경책입니다.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의 인격을 표현하는 내용이라서, 누구든지 성경을 읽고 묵상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습니다. 성격의 괴리로 고민하는 질문자에게 권면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세요. 그리고 깨달은 바를 행동하려고 해보세요. 그렇게 한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인격이 마치 건축물과 같이 높이와 길이, 넓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그래서 평생을 두고 인격을 건축하는 겁니다.
Q.저의 주 업무는 해외업체 관리입니다. 업체를 관리할 때 현지 상황에 따라 즉석에서 여러 가지 협의가 이루어집니다. 이미 협의한 사항들에 대해 출장 복귀 후 팀장의 의견에 따라 미비한 협의 내용 혹은 제가 내뱉은 말을 주워 담거나 번복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제가 업체에게 한 말을 지켜야 할까요?
A. 질문자는 정말 힘든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질문자가 해외에서 고생하면서 이뤄놓은 일들이 수포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냥 수포로 돌아가는 건 괜찮은데, 이로 인해 거래처와 본사, 쌍방 간에 손해(금전적 혹은 상호신뢰)를 입게 되는 겁니다.
만일 질문자가 회사 내에서 책임자 같으면 해외의 거래처와 결정한 일을 그대로 수행하는 게 도의상 옳습니다. 그러나 질문자가 그렇지 못한 자리에 있다면, 상사가 번복하는 걸 받아들여야 합니다. 상사에 의해 번복된 결정을 거래처에 설명을 하여 이해하도록 해야 합니다. 문제는 거래처가 번복된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입니다. 단지 신뢰에 손상을 입게 된 경우라면 그냥 감수할 수도 있겠지만, 만일 금전적 손실이 있게 된다면 그 손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겁니다. 지인 중에 누군가가, 이런 경우에 자기의 사비를 들여서 그 손실을 메꾸느라 가진 재산 모두를 잃은 걸 봤습니다. 이런 분은 정말 고지식한 분입니다.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거래처 사람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게 좋습니다. 보통 거래처와의 거래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되기에, 훗날을 기약하면서 관용을 요청하는 게 좋습니다.
Q. 초대교회, 중세교회, 현대교회...1) 말씀 원문은 그대로인데 시대가 변함에 따라 신학 또는 우리의 믿음생활의 모습도 영향을 받는 것 같은데 이러한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2)특히 종교개혁을 생각합니다. 교회의 모습과 신학은 시행착오와 개혁을 통해서 발전해가는 과정에 있는가요? 아니면 시대가 변함에 따라 교회에 들어오는 새로운 누룩과 맞서 싸우는 과정일까요? 3)종교성 또는 신학의 영향을 거부하고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는 현대인의 성향에 따라 전도하는 모습(전략)이 달라질 수 있을까요?
A. 참고로, 성경의 원문은 지금 남아 있지 않습니다. 무수한 사본만 남아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사본들을 번역한 겁니다. 원문은 없고 사본만 있기에, 좋은 사본을 선택해야 합니다. 좋은 사본이란, 원문과 가까운 사본입니다.
근데 번역은 원문이나 사본과 다른 언어입니다. 언어 자체도 다르고, 언어의 배경도 다릅니다. 그래서 각 나라의 성경은 언어도 다를 뿐만 아니라 해석하는 패턴도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번역에서부터 해석적관점이 개입됩니다. 같은 사본을 두고도 이런 사람은 이렇게 보고, 저런 사람은 저렇게 본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번역의 역사가 성경해석의 역사, 혹은 신학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1) 비록 우리가 초대교회를 지향하지만, 초대교회의 역사적&문화적 모습을 지향하는 게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믿음을 지향합니다. 시대가 다르고, 생활 여건이 다를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본질은 동일하다는 전제에서입니다. 이런 점에서 시대마다 조금씩 다른 생활패턴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패턴을 받아들이는 건 아닙니다. 성경에 제시된 영역 안에서만 받아들이는 겁니다. 문제는, 성경에 제시된(허용된) 영역이 어디까지냐 하는 것에 대한 해석입니다. 아시다시피, 교단에 따라서 혹은 교회의 목회자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믿음생활의 패턴이 있습니다. 자신만을 옳다고 주장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성경을 떠나 상황중의를 따라 모든 걸 받아들이는 태도는 더 문제입니다.
2)종교개혁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개혁을 한다는 건, 지금 우리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겁니다.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고서는 개혁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럼 우리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무엇을 통해서 알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교회의 완전한 모델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런 교회가 없습니다. 초대교회는 그 시대의 완전한 교회였겠지만 지금 우리들에겐 그렇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초대교회를 모델로 삼고 있는 건, 교회의 본질에 관한 것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처럼 교회의 본질을 갖춘 교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개혁의 내용은 전부 교회의 본질과 관련됩니다. 교회의 행위는 그 다음 문제인 겁니다. 지금 서울이기는교회가 수행하는 과제는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겁니다. 질문자가 지적한 것처럼, 지금 교회 안에는 누룩이 많습니다. 교회 밖에서부터 들어온 누룩은 교회의 본질을 훼손시켰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 한국교회는 기업화되고 있습니다. 대기업에 취직한 청년들이 뿌듯해 하는 것처럼 대형교회에 나가는 성도들은 뿌듯해합니다. 기업이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듯이, 교회도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돈 문제 외에, 아론이 만들었던 금송아지와 같은 유의 우상들이 교회 안에 많습니다. 교회개혁은 이런 것들이 성경에서 금하는 것이라는 걸 밝혀내고서 제거하는 겁니다. ‘새로운 누룩’이라고 표현했는데, 엄밀히 말하면 새로운 건 아닙니다. 이미 이런 누룩은 초대교회에서부터 계속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런 누룩을 지적하고 제거하는데 애썼던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바울이 쓴 서신서들을 통해서, 지금 우리에게 있는 누룩을 발견하는 눈과, 그 누룩을 제거할 수 있는 전략을 가져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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